이 글은 한 친구와 나눈 종교에 관한 이야기 가운데 저의 의견을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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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있는 연습장 -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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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작-신이 있을까? (2009. 4. 4.)
듣기로는 이단과 정통을 가르는 기준은 믿는 사람의 수라고 하네. 많은 사람들이 믿으면 정통이 되는 것이고 아니면 이단으로 몰리고. 믿음의 세계에 현실 정치가 끼어드는 것이 불합리해 보이긴 하지만, 어차피 종교나 믿음에는 감정과 욕심이 깊게 반영되어 있으니.
신이 있는지를 논리적으로 증명하는 일은 신자들에게도 무척 어려운 일이었나 봐.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칸트는 당시 유럽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던 네 가지 정도의 신의 존재 증명을 검토한 다음, 그 증명들이 모두 논리적으로 허술하다고 지적하고서는, 결국 신은 요청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던데(아마도 '실천이성비판'에서).
그런데 내 생각으로는 신이 있는지 없는지를 증명하는 일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의문이 들어. 물론 교단을 조직하고 종교의 사회적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극히 중요한 일이긴 하겠지만, 개인적 경험으로 볼 때, 무언가를 믿을 때에는 신이 정말로 있는지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거든. 있다 없다를 따지기 이전에 신은 내 앞에 서 있었고, 삶을 이끌어주는 존재로 드러나 있었거든(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한때 신앙이라고 할 수 있는 믿음을 가졌던 적이 있는데, 그 때의 경험이야).
#2. 이단 문제와 신에 관한 입장 (2009. 4. 7.)
이단-정통 문제는 불교처럼 포용력이 높은 종교라면 문제시되지도 않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유일신을 믿는 종교인 기독교나 이슬람교에서는 중요한 문제이지. 사실 그 문제는 교리 자체의 해석 보다는 교단의 유지라는 문제와 더 큰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신의 존재 증명도). 가톨릭 교단이 쌓아올린 조직과 권위는 스스로 정통이라고 주장하는 교리에서만 유지될 수 있으니(로마 가톨릭교는 탄생 초기부터 로마 권력과 결탁해, 종교에서 정치권력과 종교 권력이 서로의 뒤를 봐주는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좀 더 그런 경향이 강한 것 같아). 16세기 이후에 유럽에 종교 개혁 운동이 일어났을 때, 교황청에서 그렇게 억압을 한 것이 신학적인 문제 때문만은 아니지 않니. 종교가 세속의 일에서 약간의 거리는 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지만 두 명의 사람만 모여 있어도 이해관계가 달라지고 의견의 충돌이 생기는 세상에서 종교가 정치적이지 않게 될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낮다고 봐(그런데 요즘 다른 곳에서도 한국처럼 이단-정통 논쟁이 심한지는 잘 모르겠어. 한국이 유독 순혈 정통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어서).
신이 전지전능한 힘을 갖는 것은 내가 생각하기에는 기독교가 탄생할 당시의 사회적 정치적 환경의 영향이 크다고 생각해. 고대 이집트와 아라비아 지역에 여러 종교가 있었고 각각 저마다의 신을 맏고 있긴 했지만, 어느 정도의 종교적 관용이 유지된 것 같거든. 기독교나 이슬람교에서 섬기는 신인 야훼만큼 배타적인 신은 좀 드문 것 같아. 야훼가 그런 성격을 갖게 된 것은 아마도 유대인이라는 약소민족의 수호신이라 그런 것 같아(이 게시판의 '야훼가 질투하는 신이 된 까닭'을 읽어보세요). 물론 이집트에서 믿는 종교의 영향을 받아서 그렇게 되었을 수도 있고(유대 민족의 형성 초기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문명이니까). 이집트에서는 파라오=신의 자식(또는 신)=모든 힘의 소유자이니까.
신에 대한 입장은 나도 비슷해. 굳이 필요치도 않은 존재나 개념을 만들어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다고 봐(나도 신을 믿는 건 망상에 가깝다고 생각해). 신을 믿을 사람은 믿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믿지 않으면 되고, 서로를 신념을 존중해주는 관용을 가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 비록 망상이라 할지라도 신을 믿고 있는 사람이 10억 명이 넘는 상황이니.
*모태신앙인 목사의 따님 이야기.. 주위에서 있다고 해서 믿는 신이랑, 신 따위 듣보잡 취급하고 있는데 갑작스레 찾아와서 감싸버리는 신이랑 좀 느낌이 다르긴 할 거야.
#3. 맹목적 믿음이 일으키는 갈등과 종교적 관용 (2009. 4. 8.)
그런데 그 로마 황제는 신의 전지전능함보다는 가톨릭 교단의 수직적 질서 체계가 더 마음에 들었을 것 같아. 황제와 신민이라는 정치 질서에는 참 잘 어울리는 교리와 교단을 가진 종교였으니.
확신범이라.. 그 문제는 좀 어렵긴 해. 교리의 기본 바탕이 워낙 배타적이라 다른 종교나 생각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문제.. 그렇다고 교리를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빠른 시일 내에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마땅한 해결책이 떠오르지는 않네.
그런데 세속의 이해가 관련되지만 않는다면, 종교적 관용을 이루는 것이 곤란한 것 같지만은 않아. 종교 사이의 교류(또는 종교인과 비종교인 사이의 교류)를 통해서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통로를 만들 수 있는 것 같긴 하니까. 지금은 교단 조직도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 상태이니 굳이 다른 집단을 강하게 배척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고. 911 테러 같은 것도 미국과 아랍 지역 사이의 뿌리 깊은 정치적 악연이 바탕이 되어 일어난 사건이고(내가 알기로는 아랍의 무슬림들이 대체로 미국을 싫어하지만 911같은 테러 행위에는 반대하고 있어).
한국처럼 종교와 정치가 분리된 사회에서는 종교 갈등이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지는 않잖아(일부 극렬주의자의 행동이 있긴 했지만. 이 정권 들어와서 종교 갈등 기미가 보이는 것은 행정부 수장이나 고위 관료들의 행태가 특정 종교 집단에 편익을 몰아주고 있는 것 같은 행태를 자꾸 보이니 문제가 된 것이고 일부 개신교 세력이 '자칭 보수' 권력과 유착을 보이는 것도 서로의 이해관계가 통하니 그런 것 아니겠니).
옛날에 가톨릭 선교사들이 중국(청나라)에 전도를 할 때, 중국의 천제(상제) 사상과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을 결합시키는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 적도 있고, 기독교가 탄생하던 시기(4세기 이전)로 거슬러 가면 기독교 종파들이(당연히 유일신을 믿는) 다른 종교랑 그렇게 크게 충돌한 것 같지도 않고(지금 로마 가톨릭의 시초가 되는 집단은 빼고).. 서로의 신념을 용인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인데, 지금도 그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 지금도 다른 종교를 존중하면서 조용한 신앙생활을 하는 기독교 종파도 여럿 있고.
필요한 것은 사람들 사이에 서로가 공유할 수 있는 합리적인 생각의 기반인 것 같아.
#4. 유일신 신앙과 과학의 양립, 성서근본주의 (2009. 4. 8.)
일단 기독교 쪽만 이야기한다면, 순수하게 교리로만 접근하면 현대 과학과의 접점을 찾을 수 없어. 세계에 관한 지식수준도 다르고 정치, 사회적 상황도 완전히 다른데, 십 수 세기 전의 생각을 지금 시대에 적용할 수는 없지 않겠니.
(교리 차원에서 다른 종교를 포용하는 유일신 종교를 설명해 놓은 책이 있는지는 나도 모르겠네. 다만 성경 해석을 문자 그대로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책은 있는데-그래서 교리의 해석에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담은, 그 효시는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이야. 국내에 일부를 번역한 번역본이 나와 있어. 출판사는 책세상, 옮긴이는 김효경)
그렇지만 믿음과 사실 문제를 분리할 수 있다면 종교적 관용을 가지는 것도 충분히 가능해보여. 관용이라는 게 같아지는 걸 의미하지는 않잖아. 서로의 영역과 역할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선에서 타협할 수 있다고 봐(기독교 쪽에서 자연학 분야에서 기독교 교리가 현대 과학의 적수가 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고, 낙태라든가 배아 복제처럼 윤리적 문제와 관련된 주제가 아니라면 별다른 간섭을 하지 않는 것처럼). 자연을 설명하는 훨씬 강력하고 효과적인 체계가 출현한 이상, 신이 자신의 영역을 내어주어야겠지.
성서근본주의자들 문제는 따로 생각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그 사람들은 성서의 형성에 관한 기본적인 사실관계조차 무시하고 있으니. 성서 형성 과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성서근본주의는 저절로 무너지게 되어 있어. 지금 국내에 번역되어 있는 성서들끼리도 서로 내용이 조금씩 다르고, 성서 내에서도 같은 사건에 대해 서로 다른 진술을 하고 있는 부분이 여러 곳인데, '성서는 완벽하다'는 명제가 어떻게 성립할 수 있겠니? 성서 내의 오류나 전승의 잘못까지도 모두 신의 계시에 따른 것이라고 하면 딱히 할 말은 없지만, 이런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사람들이 진화론을 고안하고 종교 교리를 뒤흔드는 것까지도 모두 신의 뜻이라고 할 수 있겠지.
문제는 기독교를 믿는 상당수의 일반인들이 성서가 완벽한 전승이 이루어져 왔다고 믿는 것인데, 이 점은 좀 우려할만하다고 봐. 교회에서 목사(또는 가톨릭의 사제들이)들이 설교(아니면 다른 교육 과정을 통해서)를 할 때, 성경의 정립 과정에 대해 기본적인 사실 관계를 조금만 이야기해 주어도 맹목적인 믿음이 일으키는 문제를 상당부분 막을 수 있고, 사회의 종교적 관용도가 크게 높아질 수 있을 텐데(그만큼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있을 텐데), 성직자들의 눈에는 이런 행위가 불경한 행위로만 보이나봐. 내 생각에는 성서근본주의에서 해방되더라도 기독교 정신의 실천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
*이렇게 이야기하면 새로운 종교 해석이 필요한 것 아니냐는 문제 제기를 할 수도 있지만, 신약 같은 경우에는 비록 야훼를 신으로 모시고 있고 갖가지 기적을 적어놓긴 했어도, 예수의 가르침을 펴는 데에는 천지창조 같은 내용이 전혀 필요치 않아. 예수도 신의 권능을 드러내기 위해 기적을 행한 적은 없고. 부활 이야기 같은 기적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의 문제만 해결하면 가톨릭이나 개신교 교리에서 창조론 같은 부분은 뺄 수 있을 것 같기도 해.
*경대 철학과에도 개신교를 믿는 교수가 한 분 있는데, 종파가 정통 개신교에서 보기에는 이단에 속하나봐. 매주 한두 번씩 교수 사무실에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를 하던데(목사의 설교는 동영상을 켜 놓고, 실시간 생중계인지 녹화 중계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첨단 IT 기술을 이용하고 있었어). 은근히 교수나 전문직 종사자들처럼 고등교육을 받은 엘리트 집단에서 이단 교회(기성 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이단이긴 하지만)를 믿는 사람이 많아 보여. 아마도 기성 교회에서 요구하는 맹목적인 믿음을 받아들기기 어려워서이겠지. 바깥에서 보기에는 이런 소수 종파 같은 경우에는 신도와 비신도 사이의 갈등보다는 기독교 종파 사이의 갈등이 더 큰 것처럼 보이기도 해.
*가족 구성원의 종교가 모두 다른 경우가 드물지만 있긴 하더구나.
#5. 다른 교리 (2009. 4. 8.)
한 가지 의문이 드는 점이 있는데, 종교의 교리를 불변하는 것이라 여길 필요가 있을까 싶어. 시대의 변화에 따라 교리도 바뀔 수 있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로마 가톨릭이 종교 개혁을 통해 바뀐 것처럼(물론 새로운 교리 해석을 하는 집단은 교황청에서 분리되어 새로운 종파를 만들긴 했지만). 종교의 교리가 박물관에 보관해 둔 박제 같은 것도 아닌데, 굳이 옛 사람들의 해석에만 집착할 까닭이 있을까 싶기도 해. 지금 시대에 맞지 않으면 교리를 바꿀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로는 최신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에 따라 기독교의 정경을 새로 고칠 수도 있다고 봐(가톨릭교회가 새롭게 그런 일을 벌일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이지만).
지금은 사라졌지만 영지주의 계열의 교파는 아예 다른 종교의 풍습을 기독교 안에 끌어오기도 했고(성탄절이나 부활절 같은 것이 그 흔적이야), 로마 가톨릭과 다른 교리를 가지는 기독교 종파(시리아 교회, 콥틱 교회 등)도 남아있고, 개신교 종파들 가운데에도 현재의 주류 해석과 다른 교리 해석을 가진 세력이 많이 있지 않니(이단이라는 이름을 얻는 경우가 많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