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6.4 전국동시지방선거 다음 날(6월 5일 아침)에 쓴 글입니다.
임시 메모장에서 이곳으로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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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권을 지지하는 사람으로, 어제 결과는 아쉽습니다. 광역단체장에서 경기나 인천 정도는 더 잡았어야 하는데, 서울만 잡은 건 아쉽죠. 그러나 결과는 이미 나왔고, 어제 선거에 대한 느낌은 이렇습니다.
먼저 새누리당은 생각보다 좋은 성적표를 건졌습니다. 광역단체장에서 그럭저럭 잘 막아냈고, 기조단체장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뒀습니다. 기초단체장은 정치적 상징성이 크지 않다는 점을 고려해도 잘 나온 거죠. 사실 새누리당에서 이번 선거를 통해 얻은 가장 큰 것은 새로운 대권주자 두 명을 얻었다는 걸 겁니다. 바로 원희룡과 남경필인데요, 차기 대권주자가 보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권력의 지속성을 유지할 기반을 찾은 거죠. 새누리당 내부에선 비주류에 속하겠지만, 앞으로 이 두 사람의 영향력을 무시하기 어려울 겁니다. 특히 정치적 야심이 강한 남경필은 더욱 그렇겠죠.
먼저 남경필부터 살펴보면, 이번 선거를 통해 잠재적 대권 주자로서의 역량을 키울 기회를 잡았다고 보는 게 나을 겁니다. 한사코 망설이다 나간 선거에서 어렵게 이겼다는 점에서 명분이 서죠. 더구나 새누리당 내부에서나 통하는 이야기긴 하지만 나름대로 개혁적이고 깨끗하단 이미지가 있죠. 남경필은 새누리당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서 당선이 되었지만, 앞으로 새누리당 주류 노선과는 거리를 두는 행보를 보일 겁니다. 정치적 흐름을 읽을 수 있다면, 주류를 따라 행동했다간 표심을 얻기 어려운 상황이 곧 닥치리라는 걸 알고 있겠죠. 대신 이재정 교육감 당선자와 함께 보조를 맞춰가면서 개혁적인 이미지를 쌓아간다면, 합리적 보수 또는 중도 노선을 걷는 지도자로서의 평판을 얻게 될 겁니다. 자신이 가진 기존의 장점을 살리면서, 반대쪽 세력의 마음도 함께 얻을 수 있는 길이 열리죠. 당은 개차반이지만, 그래도 저 인물이라면 표를 줄 수도 있겠다 정도. 경기도의 지역기반도 확대할 수 있고. 아마 남경필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겁니다. 이 과정에서 생기는 새누리당 주류와의 마찰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문문제겠죠.
원희룡은 남경필보다는 다소 불리한 위치지만, 역시 도지사의 경력은 도움이 될 겁니다. 제주에선 아마 원희룡이 웬만큼 커다란 실수를 하지 않는 한 지지를 거두지 않을 겁니다. 4.3에 대한 과거의 행적에도 불구하고 60%가 넘는 지지를 보내준 건 예사로 볼 게 아닙니다. 제주의 자치권 확대에 대한 염원이 강한 상태에서, 중앙정치에서 힘을 쓸 수 있는 인물을 키우는 데에는 망설임이 없을 겁니다. 다른 대안적 인물이 제주에서 나온다면 모르겠지만, 아직은 그럴만한 인물이 보이지 않으니까요. 다만 제주는 아직 한국정치에서 변두리에 속하는지라, 남경필에 비해서는 조금 더 보폭을 넓힐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겁니다.
박근혜는 이번 선거에선 상처를 입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박근혜에게 남은 건 내리막길뿐입니다. 아마 박근혜와 그 측근(+새누리당 현 주류)은 당분간은 외형상 건재할 겁니다. 적어도 7월 재보선까지는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겠죠. 그렇지만 이번 선거에서 새누리당을 지지한 50% 가운데, 상당수는 더 이상 박근혜에 대한 부채의식을 느끼지 않을 겁니다. 지난 총선부터 대선, 이번 지방선거까지, 이 정도의 지지를 보내주었으면 할 만큼 했다고 느낄 겁니다. 아직까지는 정권 초반인 만큼 힘을 실어줬지만, 세월호 참사와 인사난맥, 국정원 간첩조작, 부정선거, 불통 이미지까지, 이 정도 악재에도 불구하고 이번 지선에서 이 정도의 지지를 보내줬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앞으로 찾아올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표를 주지 않을 거란 얘기죠. 이번 지선에서 충청권의 광역단체장을 야권이 석권한 것이 그 신호일 겁니다. 이미 돌아서기 시작했다는 뜻이죠. 아마 이번에 박근혜에 대한 지지를 보내 준 50% 조금 넘는 표 가운데 2/5 정도가 이탈할 겁니다. 새누리당에 대한 맹목적 지지층 25~30%를 제외하면 떠날 거란 뜻이죠. 7월에 그 표심이 바로 드러나진 않겠지만, 박근혜 정권이 커다란 변화를 보여주지 않는다면, 내년부턴 알짤 없을 겁니다. 박근혜의 힘이 다했다는 게 바로 드러나겠죠(아마 박 정권은 변화하지 않을 겁니다. 각종 꼼수를 쓰다 내년부터 무너질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새누리당의 주류는 지금은 완고해 보이지만, 내년부턴 힘을 쓰기 어려워질 겁니다. 당 내부에서조차 권력 누수가 생길 거고요. 박 정권이 아마 이런 추세를 올해부터 읽어나갈 겁니다. 새로운 정치적 공작을 실행하지 않을까하는 염려가 들고 매우 철저한 감시가 필요한 시점이죠.
민주당은 다시 한 번 한계를 느꼈을 겁니다. 인천이나 경기 둘 중 한 곳은 잡았어야 정치적 주도권을 확실히 가져올 수 있는데, 이번 결과로 참 애매하게 되었죠. 사실 인천은 그렇게 지는 게 이해가 잘 안 되지만(재개발을 노리고 유정복을 뽑았다면 인천은 다시 늪에 빠질 겁니다), 경기는 아쉬운 게 많습니다. 그러나 대안 없이 반사이익만 노리는 전략으로는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 봅니다. 또 경기도에서 김진표가 당선되었다 한들, 민주당의 행태로 봐서는 당장의 체면치레 외에는 얻는 게 별로 없었을 겁니다. 김진표는 차기 대권주자로 적절한 인물은 아니니까요. 다만 충청을 석권한 건 의미가 있는데, 이 마음을 굉장히 세밀하게 읽고 그에 준비를 차곡차곡 해 나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지역은 박정희 지지세도 꽤 강한 곳이고 육영수에 대한 추억도 있는 지역이라 더욱 그렇습니다. 앞으로 인구 증가가 예상되는 곳이기도 하고. 현 지도부를 봤을 때 이 지역에 대한 대응이 별로 기대가 되진 않지만, 어쨌든 이 지역의 표심을 계속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면 차기 선거에선 계속 승리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마 큰 변수가 없는 한 박근혜 정권 시기가 60년을 이어 온 새누리당 계열과 현재의 범야권 세력의 권력이 교체되는 분기점이 될 텐데, 정권의 교체를 박근혜의 퇴진과 함께 이뤄낼 것인지, 아니면 한 주기의 시간이 더 걸릴지는 이번 선거에서 보여준 충청의 마음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갈라질 겁니다. 시간이 많은 건 아니죠. 충청이 이번에 민주당에 표를 줬지만, 오랜 시간 기회를 주진 않을 겁니다. 다만 민주당이 이번을 계기로 충청의 마음을 잡을 수 있다면 다음번엔 경기도를 얻을 겁니다. 그리고 그 다음엔 정권을 쥐겠죠. 아마 이게 성공한다면 새누리당은 지금과 같은 강력한 정당으로서의 면모를 잃지 않을까 싶습니다(다만 야권의 현 지도체제로는 이런 수준의 변화가 별로 가능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무너지진 않고 세력을 어느 정도 유지하겠지만, 아마 지금 민주당이 보여주는 지리멸렬 상태로 들어갈 가능성이 높죠. 새누리당의 빈 자리를 정의당이나 녹색당 같은 다른 정당이 채울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만, 그들을 위한 여유는 더 생길 겁니다.
새정치민주연합은 지금 결과에 안주하면 안 됩니다. 안철수, 문재인, 손학규, 박원순 같은 대권주자가 있다고 하지만, 현 판세로 봤을 때 결코 유리하지 않습니다. 인물로 해결이 되는 것도 아니고(선거 결과가 인물로 결판이 났다면 벌써 진작에 정권교체를 했겠죠). 박원순이 가능성이 높겠지만, 이미 나이가 있고 대통령 후보직을 수락할 거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지금 여권에 인물이 보이지 않긴 하지만, 앞에서도 얘기했듯 남경필을 필두로 한 새누리당 후보군들은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새민련은 지금부터라도 정신을 단단히 차리고 차기를 준비해야 합니다. 만년 2위로 만족할 게 아니라면요.
아쉬운 건 정의당, 통합진보당, 녹색당 같은 진보적 정치세력인데, 그저 아쉽기만 합니다. 아직 정치적 역량이 취약하고 사회적 정서도 호의적이지 않아서 당분간은 고전을 면치 못 할 것 같습니다. 내년부터 나타날 현상-박근혜 정권의 붕괴와 그로 인한 정치적 공백을 노려야 하겠지만, 당분간 큰 선거가 없어서 진입이 쉽지 않을 겁니다. 다음에 있는 큰 선거 때에는 양강 체제 속에서 소리를 내기가 어렵겠죠(특히 정권 교체가 예상되는지라 더욱 그렇습니다). 한동안 풀뿌리에서 역량을 키우며 준비해야 되겠습니다.
* 6. 5. 12시 무렵 추가 1
다만 남이나 원은 여태 안전한 길로만 왔는데, 당과 맞설 배짱이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당의 의견만 따른다면 대권은 꿈에 지나지 않겠죠. 둘의 연합 세력 구축 가능성은 있습니다.
* 6. 6. 14시 무렵 추가 2
일단 이번 선거로 보아, 국민들은 정치권이 바뀌면 표를 주겠다는 의사를 전했다고 봅니다.
동시에 올해를 기점으로 정권의 판도 자체가 흔들리기 시작할 겁니다. 지금까지 새누리당 계열의 우세가 이어져왔다면, 20년 동안의 과도기를 거쳐, 다음 권력부터는 그 축 자체가 바뀌기 시작할 겁니다. 야권의 정치인들이 이를 얼마나 잘 읽어내느냐가 문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