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는 조선 세종대에 만든 천체 관측기기로 해가 없는 밤에도 별을 이용해 시각을 측정하는 장치입니다.
실록을 보면, 세종 19년(1437) 4월 15일에 4대를 완성했는데, 한 대는 사진처럼 용으로 장식을 해서 궁궐 내에 설치를 했고, 나머지 세 대는 용 장식이 없고 바퀴가 달린 이동식 받침대 위에 설치를 하였는데 서운관과 함길도, 평안도에 한 대씩을 보내서 쓰게 하였습니다.
일성정시의는 낮에는 태양의 움직임을, 밤에는 주요 별의 위치를 측정해서 시각을 측정합니다. 날이 흐리거나 비가 오면 쓸 수 없는 단점이 있지만, 별을 볼 수 있는 날이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매우 정밀하게 시각을 측정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현재 이 관측장비의 실물은 남아있지 않고 세종대왕실록에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사진은 기록을 바탕으로 복원한 일성정시의인데, 여주군 세종대왕릉(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소재)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 일성정시의 전체 모습
▲ 다른 방향에서 본 전체 모습
▲ 최상단부. 두 마리의 작은 용은 천구의 북극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일성정시의에 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 3건이 실려 있습니다. 모두 세종실록에 있고, 일성정시의에 관한 상세한 설명은 세종 19년 4월 15일의 기록에 담겨 있습니다.
아래는 세종 19년 4월 15일의 기록입니다. 이 기록이 일성정시의에 관한 첫 기록인데, 아주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제공하고 있는 국역 조선왕조실록에서 발췌하였습니다.
세종 19년 4월 15일 (갑술) 주야 측후기인 일성정시의가 이룩되다
처음에 임금이 주야 측후기(晝夜測候器)를 만들기를 명하여 이름을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라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이룩됨을 보고하였다. 모두 네 벌[件]인데, 하나는 내정(內庭)에 둔 것으로 구름과 용을 장식하였으며, 나머지 셋은 다만 발이 있어 바퀴자루[輪柄]를 받고 기둥을 세워 정극환(定極環)을 받들게 하였다. 하나는 서운관(書雲觀)에 주어 점후(占候)에 쓰게 하고, 둘은 함길·평안 두 도의 절제사 영에 나누어 주어서 군중의 경비하는 일에 쓰게 하였다. 또 승지 김돈(金墩)에게 명하여 서(序)와 명(?)을 짓게 하니, 그 글에 이르기를,
“의상(儀象)은 더 말할 것 없이 요·순으로부터 한·당에 이르기까지 모두 귀중히 여겨서 그 글이 경사(經史)에 갖추어 나타났으나, 예전과 시대가 멀어서 그 법이 자세하지 아니하였는데,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세상에 뛰어난 신성(神聖)한 자질로써 정무를 보살피는 여가에 천문법상(天文法象)의 이치에 유념하시어, 무릇 예전에 이르는바, 혼의(渾儀)·혼상(渾象)·규표(圭表)·간의(簡儀) 등과 자격루(自擊漏)·소간의(小簡儀)·앙부(仰釜)·천평(天平)·현주(縣珠)·일구(日晷) 등의 그릇을 빠짐 없이 제작하게 하셨으니, 그 물건을 만들어 생활에 이용하게 하시는 뜻이 지극하시었다. 그러나 하루의 시각이 1백 각이요, 그리고 밤과 낮이 반씩이로되 낮에는 햇볕을 헤아려서 시간을 아는 그릇은 이미 갖추었으나, 밤에 이르러서는 《주례(周禮)》에 별을 보고 밤 시각을 구분하는 글이 있고, 《원사(元史)》에도 별로써 시각을 정하는 말이 있으나 그 측정하는 방법은 말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이에 밤낮 시각을 알리는 그릇을 만들기를 명하여 이름을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라 하였다. 그 제도는 구리[銅]를 써서 만들었는데, 먼저 바퀴를 만들어 세(勢)를 적도(赤道)에 준하여 자루[柄]가 있고, 바퀴의 지름[徑]은 2척, 두께는 4분, 넓이는 3촌이다. 가운데 십자거(十字距)가 있는데, 넓이는 1촌 5분, 두께는 바퀴와 같다. 십자 가운데는 축이 있는데, 길이는 5분 반이고 지름은 2척이다. 북쪽 면을 깎아 파되, 중심에 1리(釐)를 두어서 두께를 하고 가운데 둥근 구멍을 겨자[芥]씨 같이 만들었다. 축은 계형(界衡)을 꿰고, 구멍은 별을 살피는 것이다. 아래에는 서리고 있는 용의 모양을 만들어 바퀴 자루를 물고 있는데, 자루의 두께는 1촌 8분이며 용의 입에 1척 1촌이 들어가고 밖에 3촌 6분이 나왔다. 용의 밑에는 대가 있는데, 넓이는 2척이고 길이는 3척 2촌이며, 도랑과 못을 만들었는데, 수평(水平)을 취한 것이었다. 바퀴의 윗면에 세 고리[環]를 놓았는데, 이름을 주천도분환(周天度分環)·일구백각환(日晷百刻環)·성구백각환(星晷百刻環)이라 한다. 그 ‘주천도분환’은 밖에 있으면서 움직이고 돌며, 밖에 두 귀[耳]가 있는데 지름은 두 자, 두께는 3분, 넓이는 8분이다. ‘일구백각환’은 가운데에 있어 돌지 아니하고, 지름은 1척 8촌 4분이고, 넓이와 두께는 밖의 것과 같다. ‘성구백각환’은 안에 있어 움직이고 돌며, 안에 두 귀가 있는데, 지름은 1척 6촌 8분이고, 넓이와 두께는 안팎 고리와 같다. 귀가 있는 것은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세 고리의 위에 계형(界衡)이 있으니, 길이는 2척 1촌, 넓이는 3촌, 두께는 5분인데, 양쪽에 머리가 있고 가운데는 비었으며, 길이는 2촌 2분이고, 넓이는 1촌 8분으로, 세 고리[環]의 그림을 덮지 못하게 한 것이다. 허리의 중간 좌우에 각각 용이 하나씩 있으니, 길이는 1척이고, 함께 ‘정극환(定極環)’을 받든다. ‘정극환’이 둘이 있는데, 바깥 고리와 안 고리의 사이에는 구진대성(句陳大星)이 나타나고, 안 고리의 안에는 천추성(天樞星)이 나타나니, 남북의 적도를 바르게 하는 것이다. 바깥 고리는 지름이 2촌 3분이고, 넓이가 3분이며, 안 고리는 지름이 1촌 4분 반, 넓이가 4리(釐)이고, 두께는 모두 2분인데 약간 서로 대여서 십자와 같다. ‘계형’ 두 끝에 빈 곳의 안팎에 각각 작은 구멍이 있고, ‘정극환’ 바깥 고리의 양쪽에도 작은 구멍이 있어, 가는 노끈으로 여섯 구멍[六穴]을 통해 꿰어서 ‘계형’의 두 끝에 매었는데, 위로는 해와 별을 살피고 아래로는 시각을 알게 한 것이다. ‘주천환(周天丸)’에는 주천도(周天度)를 새기되, 매도(每度)를 4분으로 하고, ‘일구환(日晷環)’은 1백 각을 새기되, 매각(每刻)을 6분으로 하였다. 성구환도 일구환과 같이 새겼으나, 다만 자정이 신전자정(晨前子正)에 지나서 하늘이 일주(一週)하는데, 1도를 더 지나가는 것과 같이 다름이 있다. ‘주천환’을 사용하는 법은, 먼저 수루(水漏)를 내려서 동지 신전자정을 맞추고, ‘계형’으로 북극 둘째 별이 있는 곳을 살펴서 바퀴 가에 표시하고, 인해 주천 첫 도의 초에 맞게 한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 되면 천세에 반드시 차가 생기니, 《수시역(授時曆)》으로 상고하면, 16년이 약간 지나서 1분이 뒤로 물러나고, 66년이 약간 지나서는 1도가 뒤로 물러나므로, 이에 이르러 다시 살펴서 정한다. 북극 둘째 별은 북극에서 가깝고 가장 붉고 밝아서, 여러 사람이 보기 쉽기 때문에 이것으로 측후(測候)한다. ‘일구환’의 사용은 ‘간의(簡儀)’와 같고, ‘성구환’을 사용하는 법은 첫해 동지 첫날, 새벽 전 밤중 자정을 시초로 하여 ‘주천환’ 초도의 초에 맞게 하여 하루에 1도, 이틀에 2도, 사흘에 3도로 하여 3백 64일에 이르면 곧 3백 64도가 되고, 다음해 동지 첫날 자정에는 3백 65도가 되니, 하루에 공도(空度)가 3분이고, 이틀에 1도 3분으로 3백 64일에 이르면 곧 3백 63도 3분이 된다. 또 다음해 동지 첫날에는 3백 64도 3분이니 하루의 공도가 2분이고, 이틀에 1도 2분으로, 3백 64일에 이르면 곧 3백 63도 2분이 된다. 또 다음해 동지 첫날에는 3백 64도 2분이니 하루의 공도가 1분이고, 이틀에 1도 1분으로 3백 65일에 이르면 곧 3백 64도 1분이 되니 이를 일진이라고 이른다. 일진(一盡)이 되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온다. 무릇 인사의 동정(動靜)하는 기틀[機]은 실로 해와 별의 운행(運行)하는 법칙에 매였고, 해와 별의 운행은 의상 가운데 밝게 나타나므로, 옛 성인이 반드시 정치하는 도의 첫째 일로 삼았으니, 요의 역상(曆象)과 순의 선기(璇璣)가 이것이다. 우리 전하께서 제작하신 아름다운 뜻은 곧 요·순과 더불어 법을 같이 하였으니, 천고에 내려오면서 일찍이 없던 거룩한 일이다. 아아, 지극하도다. 이를 마땅히 새겨서 후세에 밝게 보여야 할 것이므로 신(臣) 돈이 감히 손으로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명을 지어 올리노라.”
하고, 그 글에 이르기를,
“요임금은 역상을 공경하고, 순임금은 기형에 뜻을 두니 대대로 전하여서 제조가 정밀하다. ‘의(儀)’라 하고 ‘상(象)’이라 하여 그 이름이 같지 아니하나, 땅을 보고 하늘을 살펴서 백성의 일을 보여 주었다. 옛일이 이미 멀어서 제도가 퇴폐하여졌으니 책에 실려 있은들 그 뜻을 뉘가 알리오. 신성하신 임금이 시대에 응해 나시어, 요·순의 법을 받아 표(表)와 누(漏)와 의(儀)와 상(象)의 옛 제도를 회복했네. 백각(百刻)으로 때를 정해 밤낮을 나누었고, 햇볕으로 때를 아는 그릇은 있으나, 밤에도 살피고자 의상[儀]을 만들도록 명령을 내리셨네. 그 이름 무엇인고. ‘일성정시의’라 일컬으며, 쓰는 법은 어떠한고. 별자리를 살펴보고 햇볕과 마추었도다. 구리로 바탕하여 만든 솜씨가 뛰어나서 비할 수 없고, 둥근 바퀴[圓輪] 먼저 하고 거(距)가 있어 운용한다. 남북이 높고 낮아 적도를 모방하고, 대 위에 용이 서려[蟠], 바퀴 자루 물고 있다. 도랑과 못이 있어 물을 담아 바르고, 바퀴 위에 세 고리[環]가 서로 붙고 의지하여 바깥 것은 주천이니, 도와 분이 벌여 있고, 안의 두 고리는 일구·성구인데, 성구환의 각은 천도같이 지나도다. 안팎 것은 움직이나, 중간 것은 굳게 붙어 움직이지 아니한다. 계형이 전면에 가로[橫] 있어 굴대[軸]가 중심을 꿰었도다. 굴대에 구멍 뚫어 겨자[芥]같고 바늘 같아 계형의 빈[虛] 끝에는 도와 각이 새겨 있다. 쌍룡(雙龍)이 축을 끼고 정극환을 받들었다. 안팎에 환(環)2727) 이 있고, 그 사이에 별이 있다. 그 별은 무엇인고. 구진(句陳)과 천추(天樞)로다. 남북이 정하였고 동서가 바르도다. 측후법(測候法)은 어떠한고. 실[線]을 써서 살펴본다. 고리[環] 위에 곧게 걸고 계형 끝에 내려 꿰어, ‘일구’에는 둘을 쓰고 ‘성구’에는 하나 쓴다. 제좌(帝座)2728) 가 붉고 밝아 북극에 가까우니, 실을 써서 살펴보면 시각을 알 수 있다. 누수(漏水)를 먼저 내려 자정을 알아보고, 윤환(輪環)에 표지(標識)하여, 주천환의 도는 것을 여기에서 일으킨다. 밤마다 도는 것이 한 도를 지나가니 도와 분이 나뉘어서 비롯하고 끝맺는다. 그릇은 정밀하고 두루 쓰인다. 선철(先哲)이 많았으나 이 제도가 없었는데, 우리 임금 처음으로 이 의상을 만드시어 희(羲)·화(和)에게 내리시니 만세의 국보일세.”
하였다. 그 글에, “구리를 써서 만들었다.”로부터, “다하면 처음으로 돌아온다.”까지는 임금이 친히 지은 것인데, 승지 김돈이 직제학 김빈(金?)에게 보이며 이르기를,
“내가 감히 글을 짓고자 함이 아니라, 다만 경들이 이를 가지고 깎고 보태어서 명과 서를 지어 오래 전하기를 도모하려고 한다.”
고 하였는데, 임금이 시각을 정하는 제도를 서술한 글이 간이(簡易)하고 상세하여 손바닥을 가리킴과 같이 명백하기 때문에 돈 등이 능히 한 글자도 바꾸지 못하고 그 글의 머리와 끝만 보태어 그대로 명을 지었다고 한다. 그 소간의(小簡儀)는 예문관 대제학 정초(鄭招)가 명과 서를 함께 짓기를,
“당요(唐堯)가 세상을 다스리자 먼저 희(羲)·화(和)에게 명하여 햇볕을 살펴서 시각을 바르게 하였는데, 이로부터 내려오면서 시대마다 각각 그 그릇이 있었고, 원나라에 이르러 갖추었다. 금상 16년 가을에 이천(李?)·정초(鄭招)·정인지(鄭麟趾) 등에게 작은 모양의 간의를 만들기를 명하니, 비록 옛 제도에 말미암았으나 실은 새 법에서 나왔다. 밑바탕[趺]은 정한 구리로 하고, 개울물의 모양을 만들어서 수평을 정하고 남북의 위치를 바루었다. 적도환(赤道環)의 전면에는 하늘 둘레의 도·분을 나누어 동서로 운전(運轉)하여 칠정(七政)과 중외관(中外官)의 입숙(入宿)하는 도·분을 헤아린다. ‘백각환’은 ‘적도환’의 안에 있는데, 면에는 12시와 1백 각을 나누어 낮에는 햇볕으로 알고 밤에는 중성(中星)으로 정한다. 사유환(四游環)이 규형(窺衡)2729) 을 가지고 동서로 운전하여, 남북을 내렸다 올렸다[低昻]하고 규측(窺測)하기를 기다린다. 기둥을 세워 세 환을 꿰었는데, 비스듬히 기대면, 사유환은 북극에 준하고, 적도환은 천복(天腹)에 준한다. 곧게 세우면 사유(四維)가 입운(立運)이 되고 백각이 음위(陰緯)가 된다. 공작이 겨우 끝나자, 여러 신하들이 명(銘)을 새겨 뒷세상에 전하기를 청하므로, 임금이 신(臣) 초에게 명하시니, 신이 절하고 명을 올리노라.”
하고, 명하기를,
“하늘의 도는 하는 일이 없고, 그릇 또한 간략함을 숭상하였다. 옛 간의는 기둥이 많았는데, 지금의 이 그릇은 들고 갈 수 있겠도다. 사용하는 방법은 간의와 같았으나, 간략한 것을 더욱 더 간략하게 만든 것이다.”
하고, 또 그 작은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에 이르기를,
“전에 만든 일성정시의는 너무 무거워서 행군할 때에 불편하기 때문에, 다시 작은 정시의(定時儀)를 만들었으니, 그 제도는 전의 것과 대동소이(大同小異)한데, 정극환을 없앤 것은 경편(輕便)하게 하려고 함이다. 먼저 누수로써 첫해의 새벽 전 밤중을 알아 맞추어서 북극 둘째 별이 있는 곳을 살펴 바퀴 가[輪邊]에 표지(標誌)하되, 그 획을 가장 길게 긋고, 북쪽으로 향하여 다시 세 획을 긋되, 점점 짧게 하고 사이의 거리는 모두 4분지 1도로 하였다. 첫해 동지 첫날 새벽 전 밤중에 주천환(周天環)의 초도를 바퀴 가의 긴 획에 닿게 하고, 다음 해에는 다음 획에 닿게 하며, 또 다음 해에는 또 다음 획에 닿게 하고, 또 다음 해에는 가장 짧은 획에 닿게 하여 해마다 한 번씩 옮겨서 5년째에 이르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동지 첫날에 성구환의 신전자정이 주천환의 초도에 닿고, 1일 자정에는 1도, 2일에는 3도에 당하여, 매년 다 그렇게 되어 여분이 없고, 다른 것은 전의 정시의와 같다. 일구를 사용하는 법은 전의 것과 같다.”
고 하였다. 그 간의대(簡儀臺)는 승지 김돈(金墩)이 기록을 지었는데, 이르기를,
“선덕 7년 임자년 가을 7월 일에 성상께서 경연에 거둥하여 역상의 이치를 논하다가, 예문관 제학 신정인지에게 이르기를, ‘우리 동방이 멀리 바다 밖에 있어서 무릇 시설하는 바가 한결같이 중화의 제도에 따랐으나, 홀로 하늘을 관찰하는 그릇에 빠짐이 있으니, 경이 이미 역산의 제조(提調)가 되었으므로, 대제학 정초(鄭招)와 더불어 고전을 강구하고 의표를 참작해 만들어서 측험(測驗)하는 일을 갖추게 하라. 그러나 그 요는 북극이 땅 위에 나온 높낮이를 정하는 데 있다. 먼저 간의를 만들어 올림이 가하다. ’고 하시므로, 이에 신 정초와 신 정인지는 옛 제도를 상고하는 일을 맡고, 중추원 사 신이천은 공역(工役)을 감독하는 일을 맡았다.
먼저 나무로 모양을 만들어, 북극이 땅에서 38도가 나온 것을 정하니, 《원사(元史)》에 측정한 것과 조금 합하므로, 드디어 구리로 간의를 만들어 장차 이룩되매, 호조 판서 안순(安純)에게 명하여 후원(後苑) 경회루 북쪽에 돌을 쌓아 대를 만드니, 높이는 31척이고, 길이는 47척, 넓이는 32척인데, 돌로 난간을 두르고 간의를 엎드려 놓았다. 정방안(正方案)을 그 남쪽에 펴고, 대의 서쪽에는 동표(銅表)를 세웠는데 높이는 5배(倍)고, 8척의 얼(?)이다. 청석(靑石)을 깎아 규(圭)를 만들고 규의 면에는 장·척·촌·분을 새겼다. 그림자[影]를 일중(日中)의 그림자와 맞추어서 음양의 차[盈]고 주[縮]는 이치를 미루어 알도록 되었다. 표 서쪽에 작은 집을 세우고 혼의와 혼상을 놓았는데, 혼의는 동쪽에 있고 혼상은 서쪽에 있다. 혼의의 제도는 역대에 같지 아니하나, 이제 《오씨서찬(吳氏書纂)》에 실린 글에 의해 나무에 칠을 하여 혼의를 만들고, 혼상의 제도는 베[布]에 칠을 하여 몸통을 만들되 둥글기는 탄환(彈丸) 같고 둘레는 10척 8촌 6분이다. 종횡으로 하늘 둘레의 도·분을 그렸는데, 적도는 중간에 있고 황도는 적도의 안팎에 나들되 각각 24도가 약하다. 중외관성(中外官星)이 두루 벌여 있어 하루에 한바퀴를 돌고 1도를 더 지나간다. 노끈으로 해를 얽어 황도에 매고, 매일 1도씩 물러나서 행하여 하늘의 행함과 합하였다. 물을 이용하여 기계가 움직이는 공교로움은 숨겨져서 보이지 아니한다. 이 다섯 가지는 옛 사기에 자세히 기록되었다. 경회루 남쪽에 집 3간[楹]을 세워서 누기(漏器)를 놓고 이름을 ‘보루각(報漏閣)’이라 하였다. 동쪽 간[東楹] 사이에 자리를 두 층으로 마련하고 3신이 위에 있어, 시(時)를 맡은 자는 종을 치고, 경(更)을 맡은 자는 북을 치며, 점(點)을 맡은 자는 징[鉦]을 친다. 12신은 아래에 각각 신패(辰牌)를 잡고, 사람이 하지 아니하여도 때에 따라 시각을 보(報)한다. 천추전(千秋殿) 서쪽에 작은 집을 짓고 이름을 ‘흠경각(欽敬閣)’이라 하고, 종이를 붙여서 산 모양을 만들어 높이는 일곱 자 가량인데, 집 가운데 놓고 안에는 기륜(機輪)을 만들어서 옥루수(玉漏水)를 이용하여 치게 하였다. 오색 구름은 해를 둘러 나들고, 옥녀(玉女)는 때를 따라 방울을 흔들며, 사신 무사(司辰武士)는 스스로 서로 돌아보고, 4신과 12신은 돌고 향하고 일어나고 엎드린다. 산 사면에는 빈풍(?風) 사시(四時)의 경(景)을 진열하여 백성의 생활이 어려움을 생각하게 하였다. 기기(?器)를 놓고 누수의 남은 물을 받아서 천도의 영허(盈虛)하는 이치를 살피게 하였다. 간의는 비록 혼의보다 간략하나, 옮겨서 쓰기가 어렵기 때문에 작은 간의 둘을 만들었으니, 대개 모양은 극히 간단하다. 사용하는 것은 간의와 같은 것이다. 하나는 천추전 서쪽에 놓고, 하나는 서운관에 주었다. 무지한 남녀들이 시각에 어두우므로 앙부일구(仰釜日晷) 둘을 만들고 안에는 시신(時神)을 그렸으니, 대저 무지한 자로 하여금 보고 시각을 알게 하고자 함이다. 하나는 혜정교(惠政橋) 가에 놓고, 하나는 종묘 남쪽 거리에 놓았다.
낮에 측후하는 일은 이미 갖추었으나, 밤에 이르러서는 징험할 바가 없어서, 밤낮으로 시각을 아는 그릇을 만들어 이름을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라 하였다. 4벌[件]을 만들어, 하나는 만춘전 동쪽에 놓고, 하나는 서운관에 주고, 둘은 동서 양계의 원수영(元帥營)에 나누어 주었다. 일성정시의는 무거워서 행군하는 데 불편하므로 작은 정시의를 만들었는데, 그 제도는 대개 같고 조금 달랐다. 이 여섯 가지는 각각 서·명이 있어 자세히 기록되었다.
또 현주일구(懸珠日晷)를 만들었으니, 밑바탕을 네모나게 하였는데 길이는 6촌 3분이다. 밑바탕 북쪽에는 기둥을 세우고 남쪽에는 못을 팠으며, 북쪽에는 십자를 그리고 기둥 머리에 추(錘)를 달아서, 십자와 서로 닿게 하였으니, 수준(水準)을 보지 아니하여도 자연히 평하고 바르다. 1백 각을 작은 바퀴에 그렸는데, 바퀴의 지름은 3촌 2분이고 자루가 있어, 비스듬히 기둥을 꿰었다. 바퀴 중심에 구멍이 있어 한 가닥 가는 실을 꿰어서 위에는 기둥 끝에 매고 아래에는 밑바탕 남쪽에 매어 실 그림자가 있는 것을 보고 곧 시각을 안다. 흐린 날에는 시각을 알기 어려우므로 행루(行漏)를 만들었으니, 몸이 작고 제도가 간략하였다. 파수호(播水壺)와 수수호(受水壺)가 각각 하나씩인데, 갈오(渴烏)로 물을 바꾸어서 자·오·묘·유의 시각을 쓴다. 작은 정시의와 현주(懸珠)·행루 등을 각각 몇 개씩 만들어 양계에 나누어 주고, 남은 것은 서운관에 두었다.
말을 타고 가면서도 시각을 알지 않을 수 없으므로 천평일구(天平日晷)를 만드니, 그 제도는 현주일구와 대개는 같으나, 오직 남쪽과 북쪽에 못을 파고 중심에 기둥을 세워 노끈을 기둥 머리에 꿰고, 들어서 남쪽을 가리키는 것이 다르다.
하늘을 징험하여 시각을 알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정남침(定南針)을 쓰나, 사람이 만든 것을 면치 못하여 정남일구를 만드니, 대개 정남침을 쓰지 아니하여도 남북이 스스로 정하는 것이다. 밑바탕의 길이는 1척 2촌 5분이고, 양쪽 머리의 넓이는 4촌, 길이는 2촌이며, 허리의 넓이는 1촌, 길이는 8촌 5분이다. 가운데 둥근 못[池]이 있는데 지름은 2촌 6분이고, 물 도랑이 있어 양쪽 머리로 통하여 기둥 가를 돌게 하였다. 북쪽 기둥의 길이는 1척 1촌이고, 남쪽 기둥의 길이는 5촌 9분인데, 북쪽 기둥의 1촌 1분 아래와, 남쪽 기둥의 3촌 8분 아래에는 각각 축이 있어서 사유환(四游環)을 받는다. 사유환이 동서로 운전하여 1각 반에 하늘을 한 바퀴 돈다. 도는 4분으로 만들고, 북쪽의 16도로부터 1백 67도에 이르기까지 중간이 비어서 쌍환의 모양과 같고, 나머지는 전환(全環)으로 되었다. 안에는 한 획을 중심에다 새기고 밑에는 네모난 구멍이 있는데, 직거(直距)를 가로 설치하고 거 가운데 6촌 7분을 비워서 규형(窺衡)을 가지게 하였다. 규형은 위로는 쌍환을 꿰고, 아래로는 전환에 다달았다. 남쪽과 북쪽을 낮추고 올려서 지평환(地平環)을 평평하게 설치하되, 남쪽 기둥의 머리와 같게 하고, 하지(夏至)날 해가 뜨고 지는 시각에 준하여, 반환(半環)을 지평아래에 가로 설치한다. 안에는 낮 시각을 나누어서 네모난 구멍의 밑바탕에 닿게 하고, 북쪽에는 십자를 그리고, 북쪽 축 끝에 추를 달아 십자와 서로 닿게 하니, 또한 수평을 취하게 한 것이다. 규형(窺衡)을 쓰는 법은, 매일 태양이 극도분(極度分)에 갈 때를 당하여, 햇볕을 통해 넣어서 정원(正圓)이 되게 하고, 곧 네모난 구멍으로 반환의 각을 굽어보면, 자연히 남쪽의 위치가 정하고 시각을 알 것이다. 그릇이 무릇 열 다섯인데, 구리로 만든 것이 열이다.
두어 해를 지나서 만드는 일을 마치니 실로 무오년 봄이다. 유사가 그 시말(始末)을 기록하여 장래에 밝게 보이기를 청하니, 이에 신이 그 논의에 참예한 까닭으로 신에게 그 사실을 기록하기를 명하셨다. 신은 간절히 생각하건대, 때를 알려 주는 요는 하늘을 관측하는 데 있고, 하늘을 관측하는 요는 의표에 있으므로, 요가 희(羲)·화(和)에게 명하여 책력에 일월성신(日月星辰)을 형성하고, 순은 선기옥형(璇璣玉衡)을 만들어 칠정(七政)을 바루었으니, 진실로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의 일이 부지런함을 늦출 수 없기 때문이다. 한·당 이후로 시대마다 각각 그릇이 있었으나, 그 법을 혹은 얻고, 혹은 잃어서 쉽게 셀 수 없었는데, 오직 원나라 곽수경(郭守敬)이 만든 간의·앙의·규표 등의 그릇은 정교(精巧)하다 이를 만하다. 오직 우리 동방에는 제작한 것을 아직 듣지 못하더니, 하늘이 좋은 운수를 열어 문교가 바야흐로 일어나니,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전하께서 성신의 자질과 공경하는 마음으로 정무를 보살피는 여가에 역상이 정밀하지 못함을 염려하고, 측험(測驗)하는 일이 갖추지 못함을 생각하여 그릇을 만들게 하시니, 비록 요·순의 마음일지라도 어찌 이에 더하리오. 그 그릇을 만든 것이 한둘만이 아니나, 약간을 기록하여 참고에 갖추게 하고, 그 규모는 옛 것만을 본받은 것이 아니라, 모두 성상의 마음으로 재결하여 다 정묘(精妙)를 극진히 하였으니, 비록 원나라 곽수경이라도 그 기교(技巧)를 베풀 수 없을 것이다. 아아, 이미 수시력(授時曆)을 교정하고, 또 하늘을 관측하는 그릇을 만들어, 위로는 천시를 받들고 아래로는 민사에 부지런하시니 우리 전하께서 물건을 만들어 일에 힘쓰게 하는 지극한 어지심과, 농사에 힘쓰고 근본을 중히 여기는 지극한 뜻은 실로 우리 동방에 일찍이 없었던 거룩한 일이니, 장차 높은 대와 더불어 무궁토록 함께 전할 것이다.”
하였다. 그 그릇을 만든 척식(尺式)은, 옛사람이 법도의 그릇에는 반드시 주척(周尺)을 썼는데, 척식을 바루어 정하는 것은 예로부터 어려워하였다. 주자가 사마 문정공(司馬文正公)2730) 의 집 석각본(石刻本) 척식을 취하여 《가례》에 실어서 후세의 법을 삼았으나, 《가례》의 판본이 세상에 행하는 것이 하나만이 아니어서 주척의 장단이 같지 아니하여 또한 의거하기 어려웠는데, 판중추원사 허조(許稠)가 홍무 계유년간에 아버지 상을 당하여 진우량(陳友諒)의 아들 진이(陳理)의 가묘에 신주 만드는 척식을 구해 얻어서 가척본(假尺本)을 만들었고, 또 의랑(議郞) 강천주(姜天?)의 집에서 지본주척(紙本周尺)을 얻으니, 그것은 바로 그 아버지 강석(姜碩)의 아우 강유원(姜有元)이 원사(院使) 김강(金剛)의 간직한 상아척본(象牙尺本)을 전한 것인데, 전면에 쓰기를, ‘신주척 정식(神主尺定式)’이라 하였다. 지금의 관척을 2촌 5분을 없애고 7촌 5분을 쓰면, 바로 《가례부주(家禮附註)》에 반시거(潘時擧)가 이른바, ‘주척은 지금 성척(省尺)의 7촌 5분 약(弱)이라. ’고 한 말과 같다. 두 척본을 서로 비교해 보니 어긋나지 아니하므로, 비로소 신주 만드는 제도를 정하여 올리니, 이로부터 무릇 사대부집 사당의 신주와 도로의 이수(里數)와 사장(射場)의 보법(步法)을 모두 여기에 의거하여 정식을 삼았다. 근래에 또 판사역원사(判司驛院事) 조충좌(趙忠佐)가 북경에 가서 새로 만든 신주를 사 가지고 와서, 다시 이 자와 비교하니, 촌·분이 서로 합하니, 이 자는 지금 중국에서도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만든 의·상·표·누(儀象表漏) 등의 그릇을 모두 이 자를 써서 제정하였다고 한다.
다음 기록은 세종 19년 6월 18일의 기록입니다. 일성정시의를 다른 기구들과 함께 북방에 보냈다는 내용입니다.
세종 19년 6월 18일 (병자) 변경에 시각을 알 수 있는 기구를 보내다
임금이 변경(邊境)의 군문(軍門)에 시각을 아는 기구가 없어서는 안 된다고 하여, 함길도 도절제사 영에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현주일구(懸珠日晷)·행루(行漏)·누주통의(漏籌通儀) 각 하나씩을 하사하고, 경원(慶源)·회령(會寧)·종성(鍾城)·공성(孔城)에는 현주일구·행루·누주통의 각 하나씩을, 평안도 도절제사 영에는 일성정시의·현주일구·행루·누주통의 각 하나씩을, 강계·자성·여연에는 현주일구·행루·누주통의 각 하나씩을 하사하였다. 서운관(書雲觀)의 관원을 나누어 보내 점시법(占時法)을 가르치게 하고, 또 경원·회령·종성·공성 등지에 술 그릇을 하사하여 야인들의 접대용으로 갖추게 하였다.
마지막 기록은 세종 27년(1445) 3월 30일의 기록입니다. 이 기사에는 이순지가 지은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의 발문을 싣고 있는데, 일성정시의라는 이름이 발문에 한 번 등장합니다. 일성정시의 자체에 대한 설명은 없습니다.
세종 27년 3월 30일 (계묘) 동부승지 이순지의 《제가역상집》 발문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이 이루어졌다. 모두 4권인데, 동부승지(同副承旨) 이순지(李純之)가 발문(跋文)을 쓰기를,
“제왕의 정치는 역법과 천문(天文)으로 때를 맞추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는데, 우리 나라 일관(日官)들이 그 방법에 소홀하게 된 지가 오래인지라, 선덕(宣德) 계축년(1433) 가을에 우리 전하께서 거룩하신 생각으로 모든 의상(儀象)과 구루(晷漏)의 기계며, 천문(天文)과 역법(曆法)의 책을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모두 극히 정묘하고 치밀하시었다. 의상에 있어서는 이른바 대소 간의(大小簡儀)·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혼의(渾儀) 및 혼상(渾象)이요, 구루(晷漏)에 있어서는 이른바 천평일구(天平日晷)·현주일구(懸珠日晷)·정남일구(定南日晷)·앙부일구(仰釜日晷)·대소 규표(大小圭表) 및 흠경각루(欽敬閣漏)·보루각루(報漏閣漏)와 행루(行漏)들인데, 천문에는 칠정(七政)에 본받아 중외(中外)의 관아에 별의 자리를 배열하여, 들어가는 별의 북극에 대한 몇 도(度) 몇 분(分)을 다 측정하게 하고, 또 고금(古今)의 천문도(天文圖)를 가지고 같고 다름을 참고하여서 측정하여 바른 것을 취하게 하고, 그 28수(宿)의 돗수(度數)·분수(分數)와 12차서의 별의 돗수를 일체로 《수시력(授時曆)》에 따라 수정해 고쳐서 석본(石本)으로 간행하고, 역법에는 《대명력(大明曆)》·《수시력(授時曆)》·《회회력(回回曆)》과 《통궤(通軌)》·《통경(通徑)》 여러 책에 본받아 모두 비교하여 교정하고, 또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編)》을 편찬하였는데, 그래도 오히려 미진해서 또 신에게 명하시어, 천문·역법·의상·구루에 관한 글이 여러 전기(傳記)에 섞여 나온 것들을 찾아내어서, 중복된 것은 깎고 긴요한 것을 취하여 부문을 나누어 한데 모아서 1질 되게 만들어서 열람하기에 편하게 하였으니, 진실로 이 책에 의하여 이치를 연구하여 보면 생각보다 얻음이 많을 것이며, 더욱이 전하께서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에게 힘쓰시는 정사가 극치에 이르지 않은 것이 없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참고자료>
-국사편찬위원회, 국역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