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열차분야지도를 보면 진수 아래쪽에 '기부(器府)'라는 바둑판을 닮은 별자리가 있습니다. 천상열차분야지도와 천문류초의 별그림에는 29개의 별이 그려져 있지만, 다른 천문관련 문헌에는 32개의 별로 이루어져 있다는 별자리입니다. 악기를 다루는 부서로, 밝게 보이면 8음이 어울리고 임금과 신하가 평안하지만 어둡게 보이면 그 반대의 별점을 가진 별자리입니다(천문류초에는 "器府 : 樂器之府. 主樂器之屬. 明則八音和君臣平, 不明則反是, 客彗犯樂官誅."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려진 위치로 보아 남쪽 하늘 어딘가(대강 서양별자리의 센타우루스, 돛, 공기펌프자리의 경계 부근)에 있었나본데, 모양부터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3개의 별이 일렬로 늘어선 모습도 찾아보기 어려운데 무려 29개(또는 32개)의 별이 바둑판 모양으로 늘어선 모습입니다. 물론 하늘에서 이런 배열이 보일리는 없습니다. 그 때문에 이 별자리가 실제로 있긴 했던 것인지, 과연 선조들이 이 별자리를 실제로 보긴 했던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
<천상열차분야지도(좌)와 천문류초(우)의 기부 별자리>
일단, 천상열차분야지도에 그려진 위치에 이러한 형태의 배열의 별은 실제 하늘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대신 그 자리에 3~6등급 사이의 별 수 십 개가 있긴 하지만 성도에 그려 놓은 것처럼 반듯하게 늘어서 있지는 않습니다. 별의 개수가 그리 많지 않기도 하고요(남쪽 하늘 고도가 낮은 곳에 있으므로, 환경이 좋더라도 실제로 볼 수 있는 별은 많아야 15~20개 정도였을 겁니다). 아주 어두운 별까지 넣으면 바둑판 모습을 찾을 수 있긴 하겠지만, 눈으로 보일리 없는 별을 찾는 것은 의미가 없겠지요. 천상열차분야지도보다 200여년 앞서 만들어진 중국의 순우천문도에도 기부 별자리가 그려져 있습니다. 모양은 천상열차분야지도에 그려진 것과는 약간 다릅니다. 32개의 별이 모두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순우천문도는 투영법이라는 측면에서 천상열차분야지도보다 엄격하게 제작된 천문도입니다. 천상열차분야지도는 별자리 형태의 왜곡을 막기 위해 투영법에 맞지 않더라도 눈에 보이는 모양대로 별자리 모양을 고쳐 그린 성도이지만, 순우천문도는 별자리 모양의 왜곡을 감수하고 투영법에 맞춰 그린 성도이지요. 그래서 순우천문도의 테두리에 있는 별자리는 원의 둘레 방향으로 길게 늘어져 있습니다. 단 한 가지 예외가 있는데요, 바로 기부 별자리입니다. 여기에도 바둑판 모양으로 왜곡 없이 그려져 있지요.
<순우천문도의 기부 별자리>
이 정도면 의심이 듭니다. 적어도 순우천문도를 그린 이는 기부 별자리를 실제로 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 아닐까? 자신이 보진 못했지만, 고문헌에 별자리가 있는 까닭에 그 모양대로 그려 놓았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16세기 이후 서양의 천문학이 동양에 전해지면서, 서양에서 중국으로 건너간 여러 천문학자(겸 선교사)들은 중국의 옛 별자리를 실제 하늘과 맞춰보는 작업을 수행합니다. 이 작업은 조선에도 영향을 끼쳐 19세기 중반, 남병길이라는 천문학자는 별 목록을 정리해서 '성경(星鏡)'이라는 책을 펴내지요(1861년). 여기에 기부 별자리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요? 간단합니다. "지금은 없다(今無)." 당시 관상감의 천문학자였던 남병길은 이 별자리를 보지 못한 것입니다. '성경'의 기초가 되는 별 목록을 만들었던 서양의 천문학자들도 기부 별자리를 찾지 못한 것이 분명합니다. 청나라에서 펴낸 '의상고성'과 '의상고성 속편'에는 이 별자리의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중국어 위키백과 : 清欽天監所編《儀象考成》及《儀象考成續編》未收錄此星官,器府所含恒星的精確位置未知). 당연히 동양의 별자리를 서양인들에게 가르쳐주었을 당대 중국의 천문학자들도 보지 못했겠지요.
<천문류초(좌)와 성경(우)의 기부 별자리에 대한 설명>
다만 무시할 수 없는 기록이 있는데요, 조선왕조실록에 남아있는 기부성(器府星) 기록입니다. 모두 3건이 있는데요. 중종 28년 12월 25일에는, "밤. 유성이 진성(軫星)에서 나와 기부성(器府星)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병(甁)과 같고 꼬리 길이는 2∼3척쯤이면 붉은 빛깔이었다. 햇무리가 지고 양이(兩珥)가 있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명종 3년 9월 28일에는 "밤에 유성이 오거성(五車星)에서 나와 호성(狐星)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 같았고 꼬리 길이는 1장쯤 되었으며 붉은 빛깔이었다. 유성이 익성(翼星) 아래에서 나와 기부성(器府星)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 같았고 꼬리 길이는 4∼5척쯤이었으며, 붉은 빛깔이었다.", 인조 5년 11월 12일에는 "유성(流星)이 기부성(器府星) 아래에서 나와 곤방(坤方) 하늘가로 들어갔다."는 기록이 있고요. 이 기록을 남긴 천문학자들은 분명히 기부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후엔 전해지지 않았을까요. 혹시 잘못 본 것은 아닐까요? 인조 5년이면 1627년으로, 아직은 서양의 천문학이 소개되기 전이지만, 곧 서양의 천문학이 본격적으로 도입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기부 별자리가 사라진 것일까요? 이들은 무얼 본 것일까요? 기부를 이루는 별을 보지 못했지만 대략의 위치만을 기술한 것일까요, 아니면 그 부근에 있는 어두운 별무리를 가리켜 '기부'라 쓴 것일까요.
<기부 별자리 부근 별무리의 시대에 따른 변화. 후대로 오면서 점차 남쪽으로 고도가 낮아지고 있다.>
다만 6~7세기 이전으로 돌아가면, 세차운동으로 인해 기부 별자리로 보아도 될 만한 별 무리가 보입니다. 남쪽 하늘을 지나는 은하수 안쪽에 반짝이는 별무리가 있지요. 지금의 남십자, 용골, 돛, 센타우루스 자리에 있는 수많은 별들이 지평선 위로 올라오는데요(별자리 모양에 맞춰 개개의 별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별자리라고 가정한다면, 과거에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진 별자리로 기록할 수도 있겠습니다(12세기 전후에는 관측 없이 전승으로만 내려오는 별자리가 되었겠죠).
기부 별자리는 중국의 정사인 25사에서는 진서(사마씨의 진나라, 3세기 중~5세기 초) 천문지에 처음 등장합니다(軫南三十二星曰器府,樂器之府也). 이전의 한서 천문지나 사기 천관서에는 기부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도 진나라나 그 이전에 남쪽의 은하수에서 빛나던 별무리가 기부 별자리로 정해지고 동양의 별자리 체계에 포함 되었으나, 이후 세차운동으로 보이지 않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조심스럽게 해 봅니다. 다만 이렇게 추정하기에는 기부 별자리의 정확한 위치에 대한 정보가 너무도 부족하고, 17세기 초반 조선에서 남긴 관측기록도 무시하기가 어렵습니다. 기부에 관한 다른 기록도 찾아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참고자료>
1. 조선왕조실록 기록
- 국역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Tree=0&tabid=k
2. 천문류초, 성경 원문자료
- 한국천문학사 홈페이지 http://anastro.kisti.re.kr/book/text_service/text_service_intro.htm
3. 25사 원문자료
- 위키소스 24사 항목 http://zh.wikisource.org/wiki/%E4%BA%8C%E5%8D%81%E5%9B%9B%E5%8F%B2
4. 천상열차분야지도 및 순우천문도 도판 : Astronote에 오길순 선생이 공개한 도판 자료
- 천상열차분야지도 : http://new.astronote.org/bbs/board.php?bo_table=ancient&wr_id=430&page=12
- 순우천문도 : http://new.astronote.org/bbs/board.php?bo_table=ancient&wr_id=336&page=19
제가 천상열차분야지도를 현대 성도에 대응하여 찾아본 결과, 이는 남병길의 '성경'에 기록된 별자리와 차이가 생각보다 컸습니다. 예를 들자면, '천상열차분야지도'에 기록된 저수의 기관 별자리는 별이 27개로 직각자자리, 이리자리와 켄타우루스자리 일부에 걸쳐 있던 것돠 반면에, '성경'에 수록된 기관 별자리는 별이 10개로 천상열차분야지도에 기록되었던 것과 큰 차이가 났었습니다.
이에 제가 '기부' 별자리를 찾아본 결과, 실제로 비슷한 배열을 가진 별무리를 돛자리와 가까운 켄타우루스자리 서쪽에서 발견하였습니다.